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으로 만주국을 만든 이후 중국에 항일여론이 거세지자 1937년 노구교사건(루거우차오사건)을 통해서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한 중국군의 유격전술로 전쟁은 점차 장기화되어갔다. 일본은 군수물자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서 인도차이나의 천연자원을 원했기 때문에, 독일·이탈리아와 더불어 3국 동맹을 맺고, 인도네시아 남부에 병력을 배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미국은 인도차이나와 중국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며 석유금수조치를 취했고, 미국 내 일본자산의 동결과 함께 모든 교역의 금지조치를 취했다.
이미 미국이 장개석 정부에 계속적으로 지원을 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의 관계는 이미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까지 나빠진 상태였다. 게다가 천연자원이 나지 않는 일본은 미국이 자원수출을 중지한다면 진행하던 모든 것을 손에서 놓고 물러나든지 동남아시아의 천연자원을 얻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주둔해 있는 진주만을 기습하기에 이르렀다.
진주만 기습은 대성공이었다. 미국 함정 16척과 항공기 177대를 파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피해는 다만 항공기 29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본의 공격은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실패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당시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은 바다에 나가 있어서 피해를 면했고, 이 항공모함들은 그 후 미국 해군의 초기 태평양 방위체제에서 핵심이 되었다. 또한 진주만 해안에 있던 군사시설과 유류 저장설비도 피해를 면하여,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입은 타격을 신속히 복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진주만 공습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을 피하고자 했던 미국 내의 여론은 180도 바뀌어, 미국이 직접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은 순식간에 동남아시아 및 태평양 전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필리핀을 점령했고, 동남아시아와 미얀마의 대부분 지역,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태평양의 많은 섬들을 점령했다. 이에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남태평양을 잇는 긴 병참선을 확립하여 일본을 압박하려 하였다.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일본군은 싸움에 결말을 내기 위해 해군력과 공군력을 미드웨이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그 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미군은 일본의 대형 항공모함 4척을 모두 격침하고, 대형 순양함도 1척 침몰시켰다. 일본이 목표로 한 미국의 항공모함 요크타운 호는 격침되었지만 미드웨이 섬은 안전했다. 일본은 미드웨이에서 가장 중요한 항공모함과 가장 우수한 해군 조종사를 거의 다 잃어버렸고, 그 후 일본과 연합군의 해군력은 사실상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후 연합군은 일본이 점령한 지역들을 하나하나 탈환하기 시작했다. 필리핀과 보르네이 섬이 연합국의 손에 들어가자 일본은 더 이상 석유를 수송할 수가 없게 되었고, 일본은 더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결정적으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자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패전을 선언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패전 국민이라는 굴욕감과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 바이마르 공화국 아래서의 사회 혼란 및 정치 불안 때문에 몹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아돌프 히틀러는 극렬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지향하면서 독일 국민의 위대함을 강조함으로써 독일민중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1933년에 독재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은밀히 독일을 재무장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1936년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고 라인란트를 점령하였고, 이미 에티오피아에서 침략행위를 하고 있었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와 손을 잡고, 로마와 베를린을 잇는 ‘추축’을 선언했다.
1938년 히틀러는 독일군을 보내 오스트리아를 점령했고, 오스트리아는 당장 독일에 병합되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폴란드를 차지하기 위해서 소련과 비밀협상을 벌여,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1939년 마침내 히틀러는 폴란드에 침공했고,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2차대전 초반에는 독일이 확실한 우위였다. 객관적 군사력은 연합국에 비해서 열세였던 독일이지만 기갑사단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뛰어난 공군력을 이용하여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접수하고 네덜란드, 심지어는 연합군의 하나였던 프랑스까지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에 반해 연합군은 병력의 우위를 믿고 수비적으로 소극적인 자세로 전쟁에 임했기 때문에 독일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점에서 독일에 비해 앞서고 있었는데 그것은 막강한 해군력이었다.
프랑스까지 집어삼킨 독일은 모든 공격을 영국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해협은 막강한 독일 육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천혜의 장벽이었으며 영국과의 공중전에서 사실상 독일이 패전함으로써 히틀러의 영국 침공은 무기한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독일은 동부전선으로 눈을 돌렸다.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를 추축국으로 끌어들인 독일은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를 쉽게 점령했다. 이에 미국은 무기대여정책을 펼쳐 1차 세계대전 이후 잉여 전쟁물자를 연합국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사실상 공산주의를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싫어했다. 따라서 1939년에 맺은 독·소 북가침조약도 그에게는 일시적인 것이었을 뿐이었다. 결국 그는 전 유럽을 점령하게 되자 시선을 소련에 두었다. 소련군은 핀란드를 점령하는데도 20만 이상의 사상자를 낸 약한 군대로 보였고, 정치적으로도 공산주의에서 해방된 민중들이 독일군을 반길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소련에 대대적인 침공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연합군을 돕는 결정이었다. 영국은 섬에 고립되어 있었고, 사실상 미국과 소련은 참전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독일의 이러한 소련 침공은 연합군의 숨통을 틔워주는 결정이었다. 소련은 독일군을 영토 깊숙이까지 끌어들여 모스크바의 겨울을 이용하여 독일의 우수한 야포와 기갑사단, 항공기를 무력화시켜 승리를 이끌어내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미국의 참전은 독일에게 매우 뼈아픈 것이었다.
미국의 직접적인 참전으로 대대적으로 충원된 병력은 아프리카 전선에서 추축국을 밀어내었으며, 이탈리아 상륙작전으로 무솔리니 정부가 실각하고 이탈리아가 연합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한 스탈린의 군대가 전격적으로 진격하였으나 이미 독일은 이들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그것은 독일의 점령지 정책이 너무도 가혹했기 때문에 각지에서 저항세력들이 암약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후방에 있는 부대들이 점령지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연합군이 유럽에 상륙하게 되었다. 독일군은 히틀러의 독단적인 작전으로 계속되는 실패를 맛보았고, 고위 사령부가 몇 번씩이나 교체되는 상황 속에서 연합군에 계속 뒤로 밀리게 된다. 그리고 결국 1945년 5월 8일을 기점으로 유럽의 전쟁은 끝이 나게 된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과 1941년에는 각각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확전을 개시하기 전까지, 일본 사회를 지배했던 시대적 정신은 반(反)외세·반(反)서구와는 거리가 먼 일종의 친(親)서구주의였다. 이는 일본이 기존의 봉건적 막부체제를 타도하고 근대화를 이룬 메이지(明治) 시대부터 추구하여 온 가치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근대화 이론가이자 교육가, 학자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에서 주장되었던 ‘탈아입구(脫亞入歐)’론은 일본이 정치적·경제적 차원에서 봉건적 잔재를 털어내고 근대 문물, 제도의 수입에 매진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바 있다. 개항 이래 끊임없이 근대화를 추구해온 일본은 1930년대 중반까지도 서구를 근대화의 모델로 삼아 왔다.
그러나 군국주의적 야욕이 빚어낸 침략 전쟁이었던 만주사변-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본에게는 가장 강력한 동맹국이었던 미국이 일본에게 중국, 만주, 한국, 대만 등지에 주둔 중인 일본군의 즉각 철수를 요청한다. 대륙 진출(침략)을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본으로서는 이와 같은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일본이 이를 거부하자 미국은 미일통상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에 대한 석유, 철강, 지하자원 등 산업에 필요한 핵심 원료 수출을 전면 중단하게 된다.
새로운 원료 생산지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은 프랑스 식민 통치하에 있던 인도차이나를 침략하여 점령하고, 1941년 12월에는 강경파의 주장에 따라 진주만 폭격을 감행함에 따라 4년간에 걸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군사적 침략행위의 확대와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긴박한 변화 과정 속에서 일본은 그동안의 이념적 지향이었던 ‘탈아입구’의 기치를 파기하고 이전과는 180도로 방향을 바꾼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동아공영권 논리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이념 논리에 불과한 것일 뿐, 그 내면은 동아시아 여러 국가와 민족에 대한 경제적·사회적 침략과 수탈, 폭력적 지배의 과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또한 근대화의 길을 완전히 버리고 과거의 동아시아 질서로 회귀하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근대적 선진국 대열에 동참한다는 기존의 입장 자체는 크게 변한 바 없이 다만 그 모델을 미국이나 유럽의 강대국들로 삼지 않고 일본 스스로 선진국의 모델이 되고자 하였던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의 정치·경제적 측면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일본은 1941년 인도차이나를 무력으로 점거하고 이에 대해 미국과 영국 등이 일본을 상대로 한 자금 이동과 석유 등의 자원 수출을 금지함에 따라 기존의 산업 시설과 국내외적 생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급자족적 블록경제를 구축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 군부를 비롯한 정치권은 일본·만주·중국을 잇는 지역권을 중심으로 주요 산업시설을 세우고 여기에 인도차이나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을 원료공급지와 상품 판매 시장으로 삼는 광역 블록경제권을 구상하였던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은 이와 같은 침략적 영토확장을 이념적인 수준에서 미화한 슬로건에 불과했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태평양전쟁을 ‘서양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동아시아 민족을 해방시키는 해방전쟁’이라 선전하였지만 자신들이 계획한 동아시아 경제 블록 구상과 그 실제 진행 과정 자체가 제국주의적 확장 전쟁에 다름 아니었다.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으로 노구교 근처에서 야간 훈련중이던 일본군 중대에서 몇 발의 실탄 사격소리가 들리고 일본군 병사 1명이 행방불명이 되는 일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즉각 전투태세에 들어가 이튿날 8일 새벽 중국군 진지를 공격해 루거우차오를 점령했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중국측의 계획적인 도발’이라고 단정하면서 파병 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중국측에서는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일본은 태평양의 패권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서 4척의 중항공모함과 3척의 경항공모함을 포함한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미드웨이 섬과 알류샨 열도의 기지를 점령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암호를 해독한 뒤 일본의 의도를 예측한 미국 정보국은 미리 대비해 태평양함대의 중항공모함 3척을 집결시켰다. 이 전투는 주로 공중전 위주로 벌어졌는데 일본군은 여기서 미국의 함공모함 요크타운호를 격침시키기는 했지만 모든 함공모함을 잃었고 우수한 전투기 조련사들이 거의 전사하게 되어 전면 철수를 하게 된다. 이 미드웨이 해전으로 미국은 태평양에서 일본과 비슷한 해군전력을 가질 수 있게 되어 두 나라의 전쟁에 전환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후 처리를 위하여 연합국과 관련국, 그리고 독일 사이에서 체결된 평화협정이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조인되었기 때문에 베르사유 조약이라고 불린다. 평화회의를 주도한 세력은 영국의 데이비드로이드 조지,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미국의 우드로 윌슨,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오를란도였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주요한 의사결정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이 조약에 의해서 독일의 주민과 영토의 규모는 10% 선에서 축소되었다. 서부에서는 알자스와 로렌이 프랑스에 귀속되었고 자를란트는 1935년까지 국제연맹의 감독 하에 놓였으며 북쪽으로는 3개의 작은 영토가 벨기에에 병합되었고, 북부 슐레스비히는 덴마크 영내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폴란드가 되살아나게 되었다. 이외에도 독일의 해외 영토들도 승전국들에게 몰수당했다. 또한 전쟁 배상금으로 1320억 마르크를 책정하여 전후 독일은 이러한 막대한 배상금으로 빈곤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독일을 무장해제 시켰는데 군병력이 10만 명으로 대폭 줄었으며 장갑차·탱크·잠수함·항공기·독가스의 생산이 금지되고 라인 동쪽 50㎞ 지점에 산재해 있는 요새와 방어진지들이 모두 철거되었다.
이러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인들에게 강렬한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조약이 평화조약 14개 조항의 이념을 도외시하고 있으며 국가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가는 맹목적인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런 이유로 조약이 비준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조약의 상당부분이 개정 또는 일부 변경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역사가들이 무자비한 전후 보복과 미온적인 조약 실행이 1930년대에 독일 군국주의가 태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나치가 집권하기 전까지 독일에 집권하였던 공화국이다. 바이마르 헌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바이마르 공화국이라고 불린다. 연합군이 제시한 배상총액 1,320억 마르크를 독일은 지불할 능력이 없었고, 이로 인해 경제적 불안이 가속화되었다. 따라서 물가는 걷잡을 수 없이 폭등했고, 노동자는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합국이 독일경제의 안정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독일경제에 도움을 주자 잠시나마 사회는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29년의 세계 대공황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독일에 더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혼란 속에서 나치가 독일의 제1당으로 부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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